“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②

글 없는 이미지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 관람자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관람 경험 제안

김한솔 | 기사입력 2026/03/21 [15:37]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②

글 없는 이미지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 관람자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관람 경험 제안

김한솔 | 입력 : 2026/03/21 [15:37]

                                                                                                                                    © 김한솔 기자


인디포커스=김한솔 기자() : 일곱가지 이야기 전개

 

한국·일본·인도네시아·유럽권의 옛이야기에서 출발한 아야카 후카노(Ayaka Fukano), 마고즈(Magoz), 창작공동체A, 발린트 자코(Balint Zsako), 추미림, 이정윤, 주마디(Jumaadi) 등 총 7()의 회화, 드로잉, 영상, 인터랙티브 아트 등 80여 점의 작업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참여 작가는 각기 다른 문화권의 옛이야기를 오늘의 이미지와 공간, 책의 형식으로 전시장 전체를 글 없는 그림책으로 구성해 관람객은 설명적 글씨를 따라가기보다 이미지 사이를 오가며 각자의 속도로 이야기를 읽게 했다.

 

아야카 후카노(Ayaka Fukano)는 일본 작가이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촌법사(一寸法師)16개의 장면과 짧은 문장으로 다시 풀어내고 있다.

 

일촌법사는 일본의 전래동화이며, ‘한 치 동자라고 한다. ‘한 치 동자는 잇슨보시(一寸法師)를 우리말 어감에 맞게 번역한 이름이며 한자를 그대로 읽은 일촌법사라고 쓴다. 주인공 잇슨보시가 아주 작다는 점에서 서양 동화 엄지공주에 빗대어 엄지동자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1930년 손진태가 지은 조선민담집<김소년과 대도둑> 설화에 등장하는 요괴 일촌법사가 있는데 원래 특정한 이름이 없으며, ‘일촌법사란 이름도 저서의 일본어 번역과정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치 동자(잇슨보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고즈(Magoz)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스웨덴 말뫼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 작가로, 루이스 캐럴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출발점으로 삼아 시공간의 왜곡을 이미지의 리듬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주는 세계의 규칙이 뒤집히는 감각을 반복적인 이미지와 관람자의 참여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관람객의 참여에 따라 형태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비틀리며 방금까지 분명해 보이던 것은 곧바로 다른 모습으로 미끄러지고 있다. 관람객은 참여해 화면을 바꾸는 과정을 통해 눈앞의 질서가 어떻게 성립하고 또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창작공동체A2014년 부산을 기반으로 결성된 그림책 작가 공동체로 글과 그림을 함께 연구하며 그림책 출판을 지속해 온 공동체로 이번 전시에서 토끼전을 여러 시선을 담은 다성적 그림책으로 변주했다. 배진희, 정정아, 문가은, 나명남, 윤경미, 박영신, 김나영, 임희정, 강지원, 이주혜, 안누리, 이경아, 백미진, 이화정, 임종목 등 총 15명이 참여했다.

 

토끼전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현하지 않고 토끼의 간을 창작공동체 둘러싼 설정을 축으로 수궁의 여러 존재를 각 작가가 하나씩 맡아 15개의 장면을 구성했다. ‘이 나타나고 사라지며 의미가 바뀌는 국면들이 나란히 놓이면서 단선적인 결말이 아닌 여러 개의 이야기로 다시 읽히게 괴고 있다.

 

발린트 자코(Balint Zsako)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해 성장한 작가로 이번 트란스카르파티아 지역의 민담 봉선화를 바탕으로 벽화와 참여형 이미지 배열을 통해 열린 서사를 구성하고 있다.

 

작가는 전시 현장에서 약 열흘 동안 벽화 <그 꽃을 따도 될까를 직접 그려 완성했다. 봉선화 꽃의 꽃말이 나를 만지지 마세요(Touch me not)’이다. 보통 전시회에서의 문구는 만지지 마세요인데 이 전시에서는 벽면에 흩어진 꽃 이미지 조각을 관람객이 골라 조합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만지지 말라는 금지의 말을 어기고 있다.

 

관람객들이 꽃 이미지 조각을 선택과 배열에서 규칙보다는 자유로움을 만들고 있다. 그 결과 이야기는 하나의 결말로 닫히기보다 관람객의 이동과 조합을 따라 전시장 안에서 계속 새로이 정렬되고 있다.

 

  ▲ 주마디 〈바꿔치기(Joli Jolan)〉                                                                           ©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추미림은 프랑스 민담 코케뉴(Cockaigne)를 바탕으로 그림 형제가 만든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빵 부스러기를 쿠키와 캐시로 바꾸어 오늘의 디지털 환경으로 나타냈다.

 

디지털 화면의 최소 단위인 정방형 픽셀과 위성지도로 내려다본 상공의 시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웹 화면과 도시 구조가 공유하는 그리드·아이콘·동선의 규칙을 조형 언어로 옮기고 있다. 작가는 두 환경의 설계가 시선을 배분하고 동선을 조직하며 사용자 행동의 범위를 기본값으로 정렬하는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길을 남기기 위한 표식이 동시에 유실의 계기가 된다는 설정은 흔적이 언제든 다른 힘에 의해 지워지거나 수집될 수 있다는 불안과 맞닿아 있다. 작가는 이 빵부스러기'를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인 쿠키와 자동 저장되는 이미지 조각인 캐시로 치환하고 거울 조각 설치와 아스키 아트 영상과 게임으로 구체화한다. 관람객은 참여하는 게임을 통해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흔적을 남기는 과정 자체가 다시 수집·관리되는 구조로 돌아오는 장면을 경험하게 된다.

 

이정윤은 공기 조형, 봉제, 드로잉, 설치를 오가며 작품이 공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집중해 온 작가로 이번 전시에서는 바리공주를 바탕으로 전시 공간 구성을 책의 문법으로 다시 엮고 있으며. 전시장 안에서 생긴 감각이 전시장 밖의 시간으로 이어지게 한고 있다.

 

바리공주(바리데기)’는 한국 무속의 굿에서 구연되는 서사무가로, 원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주요 사건을 전시장 안에서 장면의 순서로 풀어내고 있다. 작가는 바리를 씨앗에 가까운 존재로 설정하고 무니라는 동행자를 통해 이동의 조건을 단순하게 만들고 있다. 어두운 밤, 커튼처럼 늘어진 길, 매달린 씨앗 등의 장면은 낙화의 사유와도 자연스럽게 맞물리고 있다.

 

주마디(Jumaadi)는 인도네시아 동자바시도아르조에서 태어나 호주 시드니와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지역을 오가며 활동하는 작가로 자바 그림자극 와양쿨릿(Wayang Kulit)의 미학과 제작 관습을 오래 참조해 왔으며, 회화·설치·퍼포먼스를 통해 이야기가 한 매체에 고정되지 않고 몸짓과 소리, 장면전환의 리듬 속에서 성립하는 과정을 작업 속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 왔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라마야나를 표현했다. ‘라마야나는 인도에서 형성된 서사가 동남아시아로 전파되며 각 지역의 언어와 공연 전통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전해져 온 대서사시로 인도네시아에서는 와양 쿨릿을 비롯한 자바·발리권 공연에서 중요한 이야기 축을 이뤄 왔다. 전승이 거듭될수록 이야기는 하나의 정본으로 굳기보다 공연의 목적과 장소, 연행의 방식에 따라 장면의 강조점과 감정의 온도가 달라졌고 그 차이는 라마야나가 같은 이야기이면서도 늘 다른 이야기로 들리는 이유가 되고 있다.

 

주마디의 공간에는 라마야나 결말부의 세 장면에서 출발한 신작 대형 회화 3점이 발리 전통 천 위에 펼쳐지고 오려낸 종이조각들이 벽면을 이루는 설치 <바꿔치기(Joli Jolan)>가 함께 놓여 있다. 회화는 다리와 전쟁, 불의 시련으로 이어지는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되 영웅담의 직선적 결말을 강조하기보다 사랑과 이별, 이동과 시간, 불과 비 같은 감각의 항목들이 장면마다 다른 밀도로 교차하는 순간을 붙잡고 있다. 종이조각들의 군집은 교환과 이동의 감각을 한 점의 서사로 정리하지 않고 이미지들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방식으로 흩어 놓아 이야기를 다시 만들 수 있게 한다.

 

부산현대미술관 측은 전시장 곳곳에 작품과 작품 사이를 은밀하게 잇는 이스터에그(Easter Egg)가 숨겨져 있다. 관람객과 작가와의 연대를 조금 만들고 싶어서 각 작가들에게 올해가 병오년 붉은 말해이기도 하니까 빨간 말을 어딘가에 좀 숨어 숨겨줬으면 좋겠다라고 부탁했다관람객이 붉은 말을 찾는 행위에도 조금 재밌는 요소가 되고, 전시 주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관람객이 작은 단서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작업들이 맺는 관계를 새롭게 살피고, 지나온 장면을 다시 돌아보게 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 “글 없는 그림책으로 한 공간마다 그때마다 한 공간이 그 책이기도 하고 실제로 이건 출판으로 이어지고, 출판은 전시장 안에 그대로 옮겨가는 것도 아니고 혹은 축소나 확장일 수도 있고 매체를 달리해서 또 다른 작업의 세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

<이메일 : sds254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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