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서를 충실히 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 “항상 기본서를 중심으로 문제를 냅니다. 학원에서 나온 책은 보지도 않고, 참고자료로 삼지도 않아요.” 국가직ㆍ지방직 공무원 시험 출제를 총괄하는 이광열 전 과장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는 국가100년 대계인 교육의 중요성을 일컫는 의미요, 공무원 등용에 있어서는 차별없는 공정성을 유지하겠다는 결의일 것이다. 그리고 인사혁신처에서 말하는 기본서라는 것은 현재 교육과정을 반영하고 있는 교과서의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수능이 100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우리는 정부의 정책을 신뢰할 수 있을까? 지난 4월 치러진 2023년 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채용 필기시험 한국사 결과를 보면 이런 정부부처의 발표를 믿어야만 할지 걱정이 된다.
해당 문항은 박정희가 집권한 뒤 추진한 사실을 묻는 문제로 인사혁신처가 발표한 답안은 “④ 브라운 각서를 체결하였다”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①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역시 답안에서 배제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사혁신처에서는 이의제기에 대한 설명조차 배제한 채 답안을 ‘④로’확정 발표하였다.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하는 표준국어대사전 상에서 집권의 의미는 “권세나 정권을 잡음, 권력을 한 군데로 모음”의 뜻을 가지고 있다. 굳이 집권이라는 해석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문제 출제의 근거가 되는 교과서에 명백히 박정희가 군사정변(1961년)을 통해 집권했으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행했다(1962년)는 내용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의 내용을 믿고 공부하였던 수험생들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17년 국정교과서 체계가 폐지 된 이래 현재 교육과정에서 사용되고 있는 검정 교과서는 교육부의 검수 과정을 거친 뒤 승인을 받아 각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각 교과서에서는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 “대통령 중심제와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마련하였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천재교육, 비상교육, 지학사, 미래엔, 동아출판)
공무원 시험은 한 해 12만 명 이상이 응시를 하는 국가 규모의 시험으로서 선지 구성의 근거와 검수 과정에 특별히 신중성을 기해야 한다. 문제가 되고 있는 2023년 9급 공무원 한국사 과목 13번 문제는 박정희의 집권 후 추진한 사실을 고르는 문제이며, 집권이라는 해석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교과서에 명백히 박정희가 군사정변(1961년)을 통해 집권했으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행했다(1962년)는 내용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인사혁신처의 답안 발표에는 집권을 대통령 재임 이후라는 뜻으로 왜곡하여 답안을 확정 발표했다.
현재 윤석열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대표 과제 중 하나는 공교육이다. 사교육 카르텔을 차단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하여 빈부에 따른 교육 기회의 차별을 뿌리 뽑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자는 데 그 뜻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주관 시험에서 정상적인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수험생들이라면 “박정희는 군사정변으로 집권했다”고 배웠을 내용에 대해 교과서의 내용을 외면한 채 다른 자료의 근거를 들어 답안을 확정하게 된다면, 그 정책의 실효성이 있을지에 대해 의문스럽다. 당장 수능이라고 하더라도 교과서의 내용을 외면한 채 다른 논리와 근거자료를 들어 문제가 왜곡된다면 학생들은 공교육을 신뢰하지 못하고, 사교육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과서 외에도 교육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박정희는 쿠데타 후 18년 5개월을 집권하였고”,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군정”이라는 내용이 나오며,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입법, 사법, 행정권을 장악하였다”고 나온다. 또한, 같은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교수학습안을 보면 박정희 정부의 내용 안에 군정시기를 같이 포함하여 묘사하여, 군사정변 후 정권을 장악했다는 표현이 나오며, 국정교과서 내에서도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추가로,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에서도 박정희는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지 1달 만에 언론을 통제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박정희와 관련된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들은 제외하고서라도 버젓이 박정희의 군 집권시기 역시 집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다른 정부기관의 집필 자료와 달리 유독 인사혁신처의 이번 문제에서만 집권이라는 뜻을 대통령 취임 이후라는 표현으로 왜곡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수험생들에게 정부기관의 발표 자료 가운데 어떠한 자료를 공식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혼란을 야기시킨다.
추가적으로 (처음 한국일보 뉴스기사를 보면) 출제위원은 기존의 문제은행 가운데에서 문제를 선정하고 추가적인 검토과정을 겪고 있다고 한다. 현재 “집권”이라는 표현은 기존 한국사 시험 문제 가운데 (고려사) 무신집권, (조선사) 서인,남인 등 붕당의 집권, (근대사) 흥선대원군의 집권, (현대사)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 등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사료 이후의 상황을 고르라던지, 대통령의 집권시기라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하여 왔다.
따라서 모든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보았을 때, 질문의 요지 자체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추진한 사실을 고르는 문제가 아닌, 박정희가 집권하여 추진한 사실을 고르는 문제에서 현재 답안으로 발표된 ‘④ 브라운 각서 체결’ 외에도 ‘① 직선제 개헌 추진’ 역시 답안에서 배제될 이유가 없다.
국가직 공무원 시험은 1년에 한 번 시행되는 만큼 수험생들에게 있어서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연례행사와 같이 공무원이나 출제위원들은 단순히 문제를 출제할 뿐이겠지만 이러한 출제 오류를 통해 1문제로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수험생들은 통째로 허무하게 1년의 시간을 날려버리는 것이고, 앞으로의 수험의 방향성에 대한 혼란을 초래한다.
여러모로 살펴보건대, 이번 공무원 시험 한국사 과목의 답안 발표에는 출제의 오류가 있다. 대법원의 판례 자료에 따르면 문제와 선지를 구성하는 출제자에게는 재량권이 있어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율성에 대해 허용하고 있으나, 기존 답안 외에도 다른 답안 추가적으로 선택될 수 있다면, 출제자의 재량권 범위와 한계를 일탈, 남용한 것이어서 위법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공정을 강조하였고, 올해 신년사에서도 공정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교육을 개혁하겠다고 발표했다. 과연 현 정부에서 생각하고 있는 교육 개혁의 과제 속에서 공정의 역할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실질적인 이익을 얻게 되는 국민들은 누구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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