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로 첫 발 내디딘 땅, 34년 뉴요커에게서 듣는다.

뉴욕 컬럼니스트 정(최)은실, 받은 것을 잘 지키고 나누며 쓴다는 청지기(stewardship)로서의 삶

김은해 | 기사입력 2019/05/29 [00:35]

간호사로 첫 발 내디딘 땅, 34년 뉴요커에게서 듣는다.

뉴욕 컬럼니스트 정(최)은실, 받은 것을 잘 지키고 나누며 쓴다는 청지기(stewardship)로서의 삶

김은해 | 입력 : 2019/05/29 [00:35]

▲  후배들 앞에선 칼럼니스트 정(최)은실    © jmb방송

 

[jmb방송=김은해 기자]성신여자대학교 간호학과 후배들에게 선배의 자격으로 강단에 선 컬럼니스트 정(최)은실은 조국을 떠난 타향인으로, 또한 두 나라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경제인으로 34년을 한 곳에서만 살아왔던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 한 것은 본인의 체험에서부터였다. 

 

그는, 뉴욕에서 산 날들이 서울에서 산 날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뉴욕의 아름다운 도시를 소개하려 합니다.

 

첫째, 뉴욕은 다양성의 도시입니다.(city of variety)

160여개국의 민족들이 30여개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그야말로 멜팅팟(melting pot)입니다. 시시때때로 곳곳에서 각 민족의 명절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리고 그때마다 함께 가서 축하도 해주고 참여도 하면서 서로를 존중해줍니다. 각 지역마다 제 나라 언어와 풍습을 가르치면서 보존하고 동시에 미국주류사회에 동화되어가는 2세들, 그들의 산 체험장이 되는 곳입니다.

 

둘째, 뉴욕은 각 방면에서 상징성과 포함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맨해턴 다운타운의 배러리파크부터 맨위 업타운의 할렘에 이르기까지, 또한 서쪽의 허드슨강변의 웨스트엔드부터 동쪽 끝의 이스트햄턴(위대한 갯츠비에 나오는)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문화의 산실입니다. 월스트릿의 증권가, 소호의 화랑들, 모마, 링컨센타, 카네기홀, 브로드웨이뮤지칼, 유엔빌딩등이 그것입니다.

 

셋째, 뉴요커들의 당당함과 박애심입니다. 뉴욕에 오래 살다보면 어느 구석, 어느 지하에 살아도 하나같이 당당합니다. 강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의 구분도 없고 퀸즈아파트에 살든 롱아일랜드저택에 살든 맨해턴에서 룸메이트를 하든 당당하게 나 여기 사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뉴욕만큼 비영리단체가 많은 곳도 드물 것입니다. 각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듯 보이나 어떤 한 잇슈가 생기면 특히 슬프거나 힘들게 된 경우, 뉴요커들은 모이고 비영리단체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금방 기금을 모으고 그 기금을 시작으로 시에 더 많은 기금을 요구하고 시는 이를 허락해서 윤활하게 기금이 쓰이도록 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익명으로 가장 많이 돕는 곳도 역시 뉴욕입니다.

 

이어, 미국 땅을 밟기까지 중학교 1학년, 선생님의 한마디가 영어에 재미 붙게 했습니다.

처음 영어를 접하고 펜멘쉽(인쇄체,필기체등)을 쓰기 시작했던 때, 영어선생님의 한마디, 영어발음과 억양이 좋다고 여러사람 앞에서 영어책 읽기를 권하셨을때 자신감과 함께 영어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시작됐습니다. 나중에는 책에는 나오지 않는 미국대통령의 연두연설문을 사서 읽고, 또 소리내서 읽고는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고3, 대학진학을 바로 코앞에 앞두고 부모님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됬는데 결국 그 대화가 저를 NMC에 오게 하고 오늘의 여러분을 만나게 했습니다. 

 

은행알 추첨으로 중학교를 들어간 첫세대여서 많은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스카웃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왜냐면 그전 까지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대부분 그대로 같은 고등학교로 진급을 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경기여고에 떨어지고 2차를 고르던 중 중앙여고에서 장학생제의가 들어와서 망설임 없이 중앙여고를 가게 되었습니다. 

 

훗날까지도 제가 결정한 아주 잘한 일중의 하나가 중앙여고를 다닌 것입니다. 공부뿐 아니라 문학, 음악 등의 예능분야도 함양시키고 인성교육도 제대로 했던 학교입니다. 고3의 끝 무렵, 부모님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

 

제가 공부를 잘 하는데 덜컥 이대나 연대에 붙게 되면 큰일이라고... 첫 등록금은 내주겠지만 동생들이 넷이나 있는데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닐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대화를 엿듣고 나는 그 다음날 담임선생님과 의논하고는 아무 망설임 없이 특차였던 NMC에 입학원서를 냈고 40명 뽑는데 1000명 가까이 응모한 25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습니다. 

 

그때 수학을 가르치셨던 담임선생님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국립의료원은 특체야, 떨어지면 서울대 원서 넣으면 돼 라고 하시던 말씀입니다.

 

그후 중동에서 희망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NMC졸업후 Bedside nursing이 싫어서 마취과를 선택해서 1년 training을 받고 NMC에서 잠깐 근무를 하던 중, 국가에서 선별적으로 사우디에 간호사를 보내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자원해서 갔고 그곳에서 주로 영어소설, 영자신문등을 보던 때입니다. 어느날, 일 끝내고 돌아와서 접해게 된 영자신문에 'After all, we are Americans'라고 탑기사로 난 것을 읽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이란에 억류되었던 미국대사관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풀려날 때였는데 제게는 문자 그대로 보이지 않고 그 문자속에 숨은 뜻이 보였습니다. 

 

마치도 '자,이봐 우리는 미국이야, 세상 어디를 가도 누구라도 우리에게 함부로 할 수 없어, 이런 뜻으로요. 제게는 보였습니다. 아, 미국은 어떤 나라일까, 

 

어떤 나라 이길래 그 사회가 국민에게 주는 자부심이 저렇게 대단할까, 정말 부럽다. 저건 단지 경제적으로 돈이 많거나 군사적으로 강하다고 될 일이 아니다. 

 

무엇인가 그 사회가 국민에게 주는 강한 메세지가 있다. 강한 사회적 합의가 있다. 아, 나는 미국에 가야겠다. 이렇게 미국에 대한 강한 집념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밑바탕엔 그동안 쌓아온 영어가 톡톡히 뒷받침 되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TOEFL or CGFNS? 이것이 문제로다.

 

2년의 사우디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80년대 초, 한국은 아비규환의 도가니속 같았고 정치계는 시정잡배들로 가득차 있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연세대 외국어학당에서 토플강좌를 듣기로 작정하고 등록했고 결국 6개월 공부한 끝에 무척 높은 점수가 나왔습니다. 미국 보스톤 쪽으로 가려고 마음먹고 UMASS에 원서를 넣었고 ESL없이 곧 바로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I20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외국학생들에게 왠만 하면 conditioning i20를 주던 때였습니다. 

 

한참 유학준비로 꿈에 부풀어있던 25세, 한 남자를 만났고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면서 잠시 유학이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우디에 함께 있던 친구로부터 CGFNS라는 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시험을 붙으면 직장까지 구해서 미국에 영주권으로 갈 수 있다는 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척 기뻤지만 내심 걱정되었던 것이 간호학이었습니다. 간호학과 영어 이렇게 두 가지를 보는데 둘 다 붙어야만 하는데 영어에는 자신이 있는데 간호학은 사실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반대의 경우이지요. 82년도, 그 시절 거의 붙는 사람이 없었던 때입니다. 아마 100여명이 연세대의 한 강의실을 빌려서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서울대간호학과출신과 저, 이렇게 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훗날 들었습니다. 물론 간호학만 붙은 사람은 여럿 있었는데 영어가 안되서 나중에 영어만 본 사람은 많이 있었습니다.

 

에이젼시를 통해서 오게 된 뉴욕, 이 땅에 20대 말에 와서 ,30,40,50대를 묻고 이제 60줄에 선지도 수년이 지났습니다. 

 

JFK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흑인이나 백인이나 동부인이나 남부인이나 누가 어떤 억양으로 물어도 대답할 수 있는 민족이 딱 둘 있습니다. 물론 캐나다, 영국, 호주 등의 영어권나라는 제외하고요. 그 두 나라가 바로 필리핀과 인도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뉴욕에 가시게 되면, 아니 뉴욕 아니라도 어느 곳이든 미국에 가셔서 병원근무를 하시게 되면 불가피하게 꼭 만나야하는 사람들이고 대부분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도인들은 권위에 대한 갈망이 많고 그 권위가 자신을 보호해 준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대부분 수퍼바이저 등의 윗자리에 있고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신뢰를 주면 가족처럼 따듯하게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필리핀인들은 잘 대해주고 부드럽고 easy going입니다. 그리고 별로 권력에 대한 탐심도 없고 하루하루를 즐거운 듯 삽니다. 당장 사귈 수 있는 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조심해야합니다. 뒤에 가서 다른 소리를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honesty면에서는 integrity가 좀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스폰서를 해준 병원은 맨해턴 차이나타운에 있는 skilled nursing facility였습니다. 가서 첫날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주위환경을 보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associate nursing director에게 말해서 내가 퀸즈에 살고 너무 먼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여러가지 옵션을 애기해줬고 내가 퀸즈근처의 직장을 찿을 때까지만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 집앞 병원에 직접 찿아가서 인터뷰했고 그 병원으로 스폰서 transfer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34년의 뉴욕생활중에서 3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병원생활을 했습니다. 

 

따라서 병원생활자체는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남편과 함께 사업을 일구어나가면서 미국, 특히 멜팅팟 뉴욕은 정말로 기회의 땅이고 그래서 무엇이든지 본인만 열심히 하면 거의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공부면 공부, 사업이면 사업 둘 다 말입니다. 저는 딸 둘에 아들 하나, 이렇게 3남매를 두었는데 각기 다 다르게 대학을 가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남이 모르는 사랍(Private)주립(State, SUNY),시립(City CUNY)대학의 면모를 볼수 있게 되었습니다. NYU를 졸업한 큰 딸은 어쩌면 제게는 가장 아픈 손가락입니다. 고등학교시절 거의 수업을 커팅해서 제적일수가 모자랐던 아이였는데 한가지 잘 했던 건, 글을 잘 썼습니다.

 

미국에서 에세이 잘 쓰는 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큰 일이지요. 등록금이 비싼 반면 작고 큰 장학금도 많아서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의 경우, 융자도 받으면서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시립, CUNY Queens College를 졸업했는데 가장 돈 안들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곳이고 현재는 제일 주급이 많이 받고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막내는 아들인데, 주립인 SUNY, Stonybrook을 졸업했고 역시 주립이라서 뉴욕주 거주자들에게는 혜택이 많았습니다. 졸업 후 석박사가 합해진 DPT(doctor of physical therapy)코스를 밟아서 현재 물리치료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제일 빚이 많은 사랑입니다. 왜냐면 DPT코스를 전액, 생활비까지 융자를 받았으니까요. 아이들 셋을 생각하면 아마 한국땅에서 길렀으면 셋 전부 제대로 학교를 졸업 못하고 다 드랍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미국, 특히 뉴욕이니까 가능했을 겁니다.

 

여기서 결론을 하면 공부도 중요하고 직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람다움입니다.

 

저는 어찌 생각하면 학교나 공부운은 없는 듯 생각됩니다. 정작 유학가려고 I20를 받아놓고 방향을 튼 것이나 Pace University에 등록하고는 둘째애를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드랍하게되고 또 Queens College에서 비교문학(Comparative Literature)을 시작하고는 셋째를 가지면서 다시 드랍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 셋이 되니까 첫 몇년 간은 연년생 아이들에 치여서 아무것도 못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아이들이 보물이고 미국에 감사하고 특히 뉴욕에서 삶의 터전을 잡았다는게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한때는 냉장고를 열면 우유가 없고 몇달을 돈을 못내서 전기도 끊기는 지극한 가난에도 처해보았고 또 한때는 뒷마당에 500명도 넘는 사람이 모여도 될 만큼 넒은 잔디가 펼쳐진 롱아일랜드의 큰 저택에도 살아보았습니다. 이렇게 아래위를 넘나드는 희비쌍곡선을 그으면서 물질에 대한 나만의 자유로움이 생겼습니다.

 

생각해보니 물질이 있을 땐 조금 편했었고 물질이 없을 땐 조금 불편했습니다. 물질이 뭐 그리 큰 건줄 알았는데 사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모게지(mortgage)를 다 갚기 전에는 집도 은행집이고 다 갚은 후에도 결국 내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결국은 세계의 시민(세계시민주의)으로서 받은대로 나누어 써야한다는 생각, 즉 받은 것을 잘 지키고 나누며 쓴다는 청지기(stewardship)로서의 삶이 옳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는 어느 것도 내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롭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며 본인의 뉴욕에서의 생활의 이야기로 강연을 마치고 후배들에게 뉴욕진출시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고 찾아오라는 당부와 함께 전자주소, 현지 전화번호를 남기는 그녀의 후배 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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